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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 (33건)

백운정 白雲亭
광산구 두정동 산82《광주읍지》(1879, 1924)에 주의 서북쪽 40리에 있으며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지었다고 했다. 기대승이 출가해 처음으로 생활한 곳으로 옛 소고용리召古龍里에 속해 있었다. 고봉의 8대손 종손 연기 현감 기상익 이후 1760년께 퇴락되었다. 광산구 임곡 본량동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경명의
관포당 灌圃堂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풍영정을 지은 칠계 김언거金彦据(1503∼1584)의 아들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가 극랑강변 어딘가에 지어 지냈다. 김광부는 선무랑 군자감주부이다. 이황이 김언거에게 보낸 '기제관포정(寄題灌圃堂)'이란 시에  ‘관포당(灌圃堂)’이 나온다. 寄題灌圃堂 漆園傲吏離風塵 千載同歸漆水
김달생(金達生)
풍영정 주인 김언거의 9대손 거이당(居易堂) 김달생(金達生 1745~1791)은 대를 이어 풍영정을 운영하며 거이(居易)하며 지냈다.이곳에 김달생과 유유상종했던 시기에 서유승(徐有升), 정기정(朴基正), 이복영(李復永), 윤치용(尹致容), 심의복(沈宜復) 등이 들려 시문을 남겼다.여기에서 읊은 시들은 모두 풍영정의 정취
이식-贈光州牧申汝萬翊全 丙戌
이식(李植, 1584~1647)의 자는 汝固(여고)이며 호는 택당(澤堂)이다. 서울 출생으로 문집으로 택당선생속집(澤堂先生續集)이 있다.生涯世亂似棲苴 난세 속의 한평생 서저¹와 흡사하니出處何方可稅車 어떻게 처신해야 편히 살 수 있을런고學士文章優吐鳳 봉황을 토해내듯² 뛰어난 문장의 학사께서 使君湖海好垂魚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임영-풍영정경차죽음선생운(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창계집 제2권 :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1696)客行未可發  나그네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함은 江雨復今夕  강에 비가 오늘 저녁 다시 내림일세名亭佳麗地  이름난 정자 아 름다운 풍광 속에 一醉如有約  약속이나 한 듯 한번 취해 보노라窓前白玉樹
이식-광주목사(光州牧使) 신여만(申汝萬) 익전(翊全)에게 주다
生涯世亂似棲苴  난세 속의 한평생 서저와 흡사하니出處何方可稅車  어떻게 처신해야 편히 살 수 있을런고學士文章優吐鳳  봉황을 토해내듯 뛰어난 문장의 학사께서 使君湖海好垂魚  동어부 찬 원님되어 호해로 나가시는구려高亭風詠行春後  봄날 순행하며 풍영정(風詠亭) 높이 오르시고瑞石煙霞拄
왕조대와 견훤대
예로부터 광주에는 왕조대王祖臺라 명명하던 곳이 있었지요. 왕조대는 왕이 머문 곳 또는 왕이 군진軍陣을 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왕이란 다름 아닌 고려 왕조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을 말합니다. 이 왕조대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어느 해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 왕건과 견휜의
박광옥
박광옥朴光玉(1526~1593)은 조선 중엽 명종과 선조 때에 성리학을 연구하고 향약을 널리 실시해 이름을 세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 의기로운 선비이다.박광옥의 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벽진나루
『세종실록』에는 광주의 나루터로 북구 용두동의 거진巨津과 함께 서구의 벽진碧津을 이야기한다. 벽진나루가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편에 광주 옛 무진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무등산은 진산이며 벽진도와 거진도가 있다고 했다.군의 서쪽에 있는 벽진나루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광주 관아와 그 서쪽
다리의 역사
광주에 다리가 언제부터 놓여 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옛 다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광주의 옛 다리는 광주의 교통로를 따라 만들어졌다. 광주는 옛 길이 별로 크지 않았고, 타 지역으로 가는 데는 광주읍성의 4대문을 통
회재유집목판/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3호(1996. 3. 19.)
서구 풍암동 769-1 음성박씨문중회재유집목판懷齋遺集木板은 조선 선조 때 사헌부 시평 등을 지낸 문신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이 남긴 유집의 목판으로 18세기에 제작됐다. 현재 가로 54.5㎝×세로 33㎝의 69매가 남아있다. 판면은 좌우 쌍변으로 가로 34.5㎝×세로 21㎝이고, 반곽은 가로 16.5㎝×세로 21㎝에 계선
개산송당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43세 때 개산 남쪽의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짓기 위해 방죽을 막았다. 방죽 위에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이 정자에서 고봉 기대승과 같이 성리학을 논했다. 그는 당대를 함께 산 광주 출신의 고봉 기대승(1527~1572)과는 소년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고봉은 1년 아래였지만 젊은 시절부터 도의지교道義之交
옛 지도 속 서구는 어떻게 생겼나
언젠가 ‘고산자 대동여지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지도에 목숨 걸고 지도 때문에 딸도 잃는 일들이 벌어진다. 지도는 문물이 소통하며 사람이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위성지도나 내비게이션 등으로 길 찾는 일이 쉬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지도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지도는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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